평범한 일을 남들과 다르게 한 것이 성공 비결

 

 

“평범한 일을 평범하지 않게 하는 것이 성공의 열쇠다.”

 

케첩으로 유명한 글로벌 식품회사를 설립한 기업인 헨리 J. 하인즈가 한 말이다. 평범한 것 같지만 평범하지 않은 이 말,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토마토케첩의 역사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케첩은 전형적인 미국식 소스로 패스트푸드의 대명사이며 서민들이 많이 먹는 대중 음식으로 알고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반전이 있다. 케첩의 기원은 정반대였다. 슬로우 푸드였으며 부자들의 음식이었고 미국 소스는 더더욱 아니었다. 

 

케첩은 전형적인 슬로우 푸드에서 비롯된 식품이다. 지금은 미국 음식의 상징으로 여기지만 사실 본고장은 아시아다. 게다가 유럽에서 그리고 아시아에서도 옛날에는 부자들이나 먹던 귀족의 식품이었다.

 

아시아 음식이었던 케첩은 17세기 유럽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곧 유럽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는데 18세기에는 중산층 이상에서나 먹을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소설 ‘오만과 편견’ 작가인 중상류틍 가정인 제인 오스틴 가족이 호두 케첩을 즐겨 먹었다. 18세기 후반의 영국 요리책에 최초의 케첩 레시피가 보이는데 케첩 만들 때 유럽 멸치인 안초비에 정향, 후추, 생강을 넣어 만든다고 나온다. 당시 최고급 향신료가 들어간 것만 봐도 케첩이 부자가 먹는 소스였음을 알 수 있다.

 

케첩이 왜 그렇게 고급이었을까? 이유는 아시아에서 가져온 고가의 수입 식품이었기 때문이다. 케첩의 뿌리는 아시아의 생선 액젓이다. 베트남의 생선 간장인 넉맘, 태국의 생선 젓갈 남쁠라, 필리핀의 생선 액젓인 파티스 같은 음식이 케첩의 뿌리다. 동남아 생선 소스가 낯설기에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생선 액젓을 떠올리면 된다. 쉽게 말해 까나리 액젓이 서양으로 건너가 토마토케첩이 됐다는 이야기다.

 

직접적인 흔적이 토마토케첩이라는 이름에 남아 있다. 영어 토마토(tomato)가 남미 인디오 언어에서 비롯된 것처럼 영어 케첩(ketchup) 역시 동남아 언어인 민난어(閩南語)가 뿌리다. 지금의 중국 남부 복건성과 타이완에서 쓰는 사투리, 그리고 동남아 말레이 계통 언어다. 17세기 영국의 동인도 회사에서 아시아 생선젓갈을 유럽으로 가져와 퍼트리는 과정에서 이름이 그대로 전해졌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 케첩이 퍼졌지만 18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에 토마토케첩은 없었다. 비싼 아시아 생선 소스를 수입하면서 값싼 토마토를 섞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토마토케첩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이 끝나면서부터다. 미국에 케첩이 전해졌을 때도 주로 버섯 케첩, 자두 케첩, 복숭아 케첩처럼 토마토가 아닌 다른 과일과 채소를 재료로 만들었다. 하지만 남북전쟁으로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빨리 그리고 쉽게 키울 수 있는 토마토를 대량으로 재배해 공급했고 덕분에 군인은 물론 민간인까지 미국 사람 모두 토마토에 입맛이 길들여졌다. 그 결과 값싼 토마토를 재료로 만든 케첩이 널리 퍼졌다.

 

토마토케첩 수요가 늘면서 19세기 후반, 미국에는 100개가 넘는 군소 토마토케첩 제조업체가 난립하며 불량 저질 토마토케첩을 쏟아냈다. 부패를 막으려고 방부제로 포르말린을 넣고 변색 방지를 위해 아스팔트용 콜타르를 넣기도 했다. 이런 불량 식품 때문에 토마토케첩이 소비자에게 외면당할 무렵, 헨리 하인즈가 반전의 아이디어로 돌파구를 마련했다.

 

남들이 내용물을 숨기려고만 급급할 때 나쁜 첨가물을 넣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특허 받은 투명 용기 케첩 병을 선보였다. 지극히 평범한 일을 평범하지 않은 방법으로 해결한 결과, 군소 불량업체들이 정리되면서 토마토케첩 인기가 높아졌고 마침내 미국을 상징하는 소스가 됐다. 

 

토마토케첩에 담긴 반전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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