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번째 이야기

 

대학생이 된 기대감을 어찌 표현할지 몰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과하게 포인트를 준 채 강의실에 앉아있던 우리는 대학교 첫 수업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을 해석했다. 대학교 첫 강의라며 부풀었던 기대는 어느새 그 강의실과 가장 어울리지 않은 소품으로 전락한 노트북과 함께 닫혔다. 꿈 많던 우리에게 훈민정음 해례본 강의는 고등학교 수업의 연장판이었다. 볼멘소리를 내던 우리를 보며 교수님은 웃으셨다. 국어국문은 기초학문이기에 응용 가능성이 어마어마하다고, 그 기본이 되는 건 우리글이니 훈민정음 해례본 정도는 툭 치면 나와야 한다고 하셨다. 국문과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도 하셨다. 그렇게 한 학기가 끝나 기말고사 답안지에 빼곡히 훈민정음 해례본을 수놓고 나오며, 우린 교수님의 말씀을 반 정도 이해한 듯 했다.

 

1년이 지나, 국문과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우리에게 후배가 생겼고 전체 모꼬지를 갔다. 특별히 초청된 대 선배로 작가로 활동하시는 한 분이 나와 직업특강을 진행했다. 이거 누가 쓴거니? 이런 질문은 대학교 오기 전에 끝냈어야 하는 거 아냐? 너희가 이렇게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국문과가 더 능력 없다는 소리를 듣는 거 아냐. 순간 싸늘해진 분위기를 만든 건 선배에게 보낸 익명의 질문지였다. 국어국문학과는 취직이 안 된다는 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누가 감히 이런 당돌한 질문을 한 건지 잡아내기라도 할 듯 눈을 돌리던 우리는 그날 3,4학년 선배들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때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한 때 세종대왕님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며 훈민정음 해례본을 줄줄 외우던 나는 없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국문과는 줄임말을 쓰지 말자, 맞춤법도 틀리지 말자고 주장하며 낄낄대던 동기들은 이제 없다. 후배들 중 복수전공을 선택하지 않은 이가 없으며 선배들은 여전히 학교 도서관에 머물며 밥 친구를 구하고 있다. 한 때 최대 경쟁률을 자랑하던 국문과 수업에 1/5이 외국인 학생으로 채워져 있다.

 

취업률이 낮다고 홀대받는 학과는 비단 국어국문학과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자부심이 넘치던 과에 대한 사랑이 옛 추억이 된 것은 여러 인문 학과들의 공통된 모습일 것이다. 인문 학과에서 배운 학문은 바로 눈앞에 성과를 내야하는 지금과 같은 환경에는 잘 맞지 않는다. 공대는 시스템을 다룰 줄 알기에 바로 현장에 투입될 수 있고, 경상대는 눈에 보이는 실적을 나타낼 수 있기에 기업들이 선호한다고 한다. 모두 공통적으로 ‘현재’만을 바라보는 사회와 발 맞춰 갈 수 있는 과목들이다.

 

인문학을 배우지 않을 때 발생하는 가장 염려되는 부분 또한 ‘현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당장 사용할 수 있고, 당장 성과를 보여야하는 사회는 고장 난 곳을 고쳐줄 수 있는 부속품만을 필요로 한다. 문제제기를 하며 현 상황에 제동을 거는 이들은 성장에 방해만 된다고 생각한다. 빠른 속도로 반응하길 좋아하는 사회니 사람들도 보다 직설적이고 짧은 글을 선호한다. 한 발자국 더 생각하거나 미래를 고민할 틈을 전혀 갖지 않는다. 미래보다는 지금 당장, 환경보다는 돈, 가치보다는 돈, 결국엔 돈이 되는 것이라면 근시안 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일이 이젠 욕먹을 일이 아닌 사회가 돼 버렸다.

 

한글날이 다가오자 훈민정음 해례본이 앵커 뒤에 비춰지는 것을 보며 한동안 잊고 있던 암기된 내용들이 줄줄 입을 통해 나왔다. 그러면서 문득 한 소절이 계속 입에 맴돌았다. ‘내 이랄위하여 어엿비녀겨 새로 스물여듫짜랄 맹가노니’ 세종대왕이 당장의 것만을 보았다면 굳이 한글을 창제하려 했을까. 복잡하고 귀찮은 글자 만드는 일을 굳이 자신의 몸을 상해가며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기존 권력가들과 싸우고 기존의 것들과 부딪혀야 하는 힘듦을 알면서도 한글을 창제한 그는 아마 한 단계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세대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후대에 백성들이 글을 몰라 억울해하지 않도록 말이다. 어쩌면 그래서 지금까지 인정받는 한글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한글날을 쉬는 날 정도로 생각하고 지나쳤다면, 한번 쯤 그 뜻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오늘이 되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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