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공학은 세상을 바꾸는 학문

로봇공학 이야기에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는 카나데 교수. 학문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다. /사진=이용우

 

타케오 카나데 카네기멜론 로봇공학 연구소 교수는 미국 대중에게 친숙한 로봇공학자다. 공상과학(SF) 영화 써로게이트(2009) 조연으로 나오기도 했고, 미국 스포츠 최대 이벤트 슈퍼볼 광고에 25초 가량 등장한 적도 있다. 


그는 시사저널e가 지난 28일 개최한 제2회 인공지능 컨퍼런스에 기조연설자로 참가했다. 로봇시야 전문가로서 빗 속에서도 잘 보이는 조명 시스템 개발 결과를 발표하며 컨퍼런스의 시작을 알렸다. 로봇공학과 인공지능을 더 알기에 짧은 시간이었다.


시사저널e는 28일 로봇공학과 인공지능의 향후 발전을 알아보기 위해 카나데 교수와 인터뷰했다.


카네기 멜론 로봇공학 연구소의 중장기 목표는.
 

"되는 일”을 하고 싶다. 카네기멜론 로봇공학연구소를 창립한 사이먼 뉴엘은 "좋은 과학은 실생활 문제에 응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이 우리 철학을 대변한다. 많은 학자들이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는 연구를 하지 않는다. 기본연구, 순수과학이 응용과학에 비해 우월하다고 말한다. 그러한 관념에 상관없이 모든 과학은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정말 좋은 이론이라면, 실생활에서 검증되고 사용되는 이론이어야 한다. 증명되지 않고, 실생활에 유용하지 않은 학문이 과연 학문인가? 카네기 멜론은 "진짜" 학문을 하려고 한다.

로봇공학과 인공지능과의 관계는.
 

로봇공학이 인공지능을 포함한다. 로봇공학은 실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이를 바꿀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진 학문이다. 주위 환경에 관한 정보를 해석·반응·개선시킬 수 있는 시스템을 말한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인공지능이 있다고 하자. 아이들이 문장을 읽다가 말을 더듬는다. 인공지능은 특정 단어를 설명해주거나 발음해주어서 학습을 도와준다. 나는 이를 로봇공학이라고 부른다. 기계·인공지능을 통해 아이들에게 교육을 제공하는 일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동문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문 앞에 서있는 걸 인지하고, 문을 열어주고, 우리가 지나갈 수 있게 세상을 바꿔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동문은 "똑똑한" 시스템은 아니다. 우리가 추운 날 문 앞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을 때, 우리가 문이 열리기 원하지 않더라도 문을 열기 때문이다. 똑똑한 인공지능, 똑똑한 로봇 시스템은 택시가 오기 전까지 나가고 싶어하지 않는 다는 점을 깨닫고 문을 열어주지 않을 수도 있다.

인공지능이란 무엇인가.


인공지능은 '기술,' '도구'의 개념이 아니다. 나는 인공지능을 '가능성,' '수행능력'으로 인식한다. 우리 지능도 그렇다. 문제해결능력만이 지능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인간 뇌는 그 절반을 시각 능력에 할애하고 있다. 문제해결능력에 쓰이는 부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시각은 특히 인공지능, 아니 인간 지능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똑똑한 지능을 갖춘 기계들은 시각적인 정보를 얻는데 많은 자원을 집중한다.

 

바둑을 예로 들어보자. 인간은 시각적인 정보로 바둑을 인식한다. 알파고 같은 인공지능은 바둑기보를 분류한다고 하지만 시각적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통계로 추산해, 바둑판 좌표 패턴 분석에 그친다. 바둑 고수가 경기중 바둑판을 휙 보고 '백이 이기고 있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시각적인 정보로 바둑판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딥러닝으로 무장한 알파고 같은 인공지능은 이렇게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시각은.


빛을 인식하고 포착할 수 있는 눈, 즉 카메라다. 인간 눈은 한정된 기능만 가지고 있다. 적외선, 자외선 감지가 불가능하고다. 안광을 뿜으며 빛을 낼 수도 없고, 초음파를 통해 물체를 '직접적'으로 인식하지도 못한다. 들어오는 빛을 감지하는 수동적인 형태다. 그런 관점에서는 로봇이 이미 인간을 능가했다. 물론 주어진 시각정보를 해석하는 능력은 아직 인간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럼에도 인간이 시각정보를 입수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이 물체를 바라볼 때 전체시야 중 2도밖에 집중해서 바라보지 못한다고 한다. 많은 과학자들은 특정 정보를 선택하고 집중해서 바라볼 수 있는 인간 시각 시스템이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나는 반대다.
 

인간은 사물의 본질을 외면한 채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만 물체를 인지한다. 기계는 이 점을 극복할 수 있다. 미식축구 쿼터백은 공을 팀원에게 던져주는 포지션이다. 인간과 로봇 쿼터백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인간은 한정된 공간만 인식 가능하고 그 중 최적의 위치에 있는 팀원에게 공을 던진다. 로봇은 모든 시야를 한 번에 보고 더 좋은 곳에 공을 던질 수 있다. 과연 인간이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인가? 기계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미래 로봇은 인간과 다른 형태를 띄나.
 

무조건 그렇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로봇이 가진, 인간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제한할 필요가 없다. 물론 인간이 현존하는 가장 정교한 지능·기계다. 아직까지는 인간 시각 체계가 가장 정교한 시각측정기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의 시각체계를 공부한다. 하지만 더 나아가야 한다. 인간을 넘어서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

육체, 즉 로봇 몸은 지능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인가.
 

그렇다. 다른 환경과 상호작용을 해야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우리 육체도 주위 환경을 인식•이해하고 그 환경을 나에게 이롭게 바꾸기 위해 존재한다. 지능은 정신, 즉 로봇으로 치면 소프트웨어에 해당하지 않는다. 육체와 지능은 서로 뗄 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다. 로봇공학이 그런 연유로 인공지능을 포함한다.

초지능은 가능한가.
 

물론이다. 100%라고 생각한다. 내가 학생이던 80년대에 사람들은 나에게 인공지능은 체스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딥 블루가 등장해 인간 체스 챔피언을 이겨버렸다. 바둑도 마찬가지.
 

인간이 풀기 어려운 문제들은 인공지능에게 그다지 어렵지 않다. 개발자 입장에서 보면 직관이나 감정에 의존하는 인간은 한계가 명확하다. 하지만 인공지능에게는 그저 좀 더 복잡한 문제였을 뿐이다. 앞으로 인공지능도 인간이 보기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들을 조금씩, 천천히 해결해 나갈 것이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이 감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감정을 이입해서 문제를 접근할 수도 있다. 바둑을 이기는데 감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할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 같은'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아직 초지능이나 범용인공지능 개발 단계에 도달하려면 멀었다. 하지만, 범용인공지능이 더 어렵다. 로봇에 인간 같은 한계를 부여하는 일이 한계를 극복하는 일보다 어렵다. 한계속에서 사고하는 일, 인간의 한계가 무엇인지 알고, 이를 기계에 도입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상상이 가는가?

지능폭발과 특이점에 대한 견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이 인공지능을 만든다. 우리는 언제나 인공지능 발전속도를 제한할 수 있다. 발전기를 차단하면 된다. 이미 우리는 많은 자원을 기계와 인공물에게 주고 있다. 목성에 파견한 많은 우주선들은 자가발전기를 갖고있다. 정말로 초지능, 지능폭발, 특이점 등으로 찾아오는 기계지배하 미래가 두렵다면 자원을 차단하면 된다.
 

내가 묻고 싶은 건, 기계가 우리를 지배하는 일이 나쁜 일일까? 기계지도자와 인간지도자가 있을 때 나는 주저 없이 기계를 고르겠다. 더 정당하게 공무를 집행 하고, 뇌물이나 다른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기계라는 사실에 거부감을 가질 수는 있다. 하지만 합리적이고 공정한 사회로 나아가는 길이 될 수도 있다.
 

물론 나는 암울한 미래보다 밝은 미래를 기대한다. 우리가 목표하는 로봇이 개발된다면, 인간은 더 이상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기를 발전시키기 위해 일을 하는 사회가 온다.
 

연구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인재다. 인공지능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좋은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뜬구름 잡는 이론을 탐험하는 사람도 아니고, 자잘한 기술 하나 발전시켜 성과 아닌 성과를 이룬 사람도 아니다.
 

인공지능은 똑똑한 사람들이 과제를 정의·노력·해결하면서 발전해왔다. 돈이나 기술력이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아이디어와 새로운 시각이다. 좀 냉소적으로 보면, 딥러닝도 결국은 '패턴분류'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류기술을 지능의 일부분이라고 인식·개발하고 나니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딥러닝을 기반으로 지능의 다른 영역까지 개발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발전을 이룩하는 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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