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적 안목 중시한 창업주 정신 실종…2·3세 무리한 사업 확장

한진해운 법정관리로 한진그룹이 위기를 맞은 가운데, 재계에서는 한진가 2,3세에 대한 경영능력이 도마 위에 올랐다. 사진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왼쪽)과 조원태 대한항공 부사장이 2014년 11월 5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제26차 한미재계회의에 참석한 모습. / 사진=뉴스1
한진그룹은 위기를 먹고 자랐다. 일제 수탈로 경제가 어려웠던 1945년, 누구도 섣불리 사업에 뛰어들지 못할 때 고(故) 조중훈 한진그룹 명예회장은 인천항 화물량이 늘 것을 예측하고 한진상사를 차렸다. 한국 전쟁 발발로 인천이 폐허가 되자 미군과 운송계약을 맺고 사세를 불렸다. 이렇게 거둬들인 수익이 한진그룹이 ‘운송대국’으로 성장하는 토대가 됐다.

70여년이 흐른 오늘날 한진그룹은 다시 위기를 맞았다. 한진해운은 빚더미 탓에 법정관리 처지가 됐다. 이로 인해 대한항공 경영도 난기류에 봉착했다. 재계에서는 조중훈 전 회장이 경영철학으로 삼았던 ‘대분망천(戴盆望天)’ 정신, 즉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과 보수적 경영의 중요성을 2·3세 경영인이 이어받지 못한 탓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9일 국회에서 열린 조선·해운업 연석청문회, 이른바 ‘서별관 청문회’ 화두는 한진해운이었다. 여야 국회의원들은 한진해운을 흔들리게 한 주범을 추궁하기 위해 여러 증인들은 출석시켰다.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이 그 중 하나였다.

최 전 회장은 2006년 11월 남편인 고(故)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이 별세하자 이듬해부터 8년간 한진해운을 경영했다. 문제는 최 전 회장이 2014년까지 한진해운을 경영하는 동안 부채비율이 폭등했다는 것이다. 이 기간 회사의 부채비율은 405%에서 1450%까지 뛰었다. 조양호 회장이 2014년 뒤늦게 구원투수로 한진해운 수뇌부로 합류했지만 살려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최 전 회장은 이날 청문회를 통해 "가정주부였다가 나오게 돼 전문성이 부족하다 판단해 처음부터 대표이사를 맡지 않고 부회장으로 취임했다"며 "2년간 당시 박정원 사장을 비롯해 각 부서의 최고 해운업 전문가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사실상 재임기간 자신이 경영 일선에 참여하지 않았다며 책임론을 회피한 것이다.

업계에서는 예상된 반응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최 전 회장은 말 그대로 얼떨결에 해운업 수뇌부가 됐는데 뭘 알았겠나. 벼락치기로 공부해서 한진해운을 이끌었던 것”이라며 “자기 능력으로 이룬 게 없으니 책임을 떠안기도 억울할 것이다. 결국 한진해운 사태 화살은 조씨 오너가에게 향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조양호 회장이 한진해운 경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룹 수장으로서 해운업을 미리 챙겼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진그룹 창업주인 조중훈 전 회장은 줄곧 “수송업은 보수적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강조해왔는데, 경영 2세인 조양호 회장이 이 같은 철학을 이어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진해운 채권단 한 관계자는 “한진그룹 내 누구도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 듯하다. 최은영 전 회장은 말할 것도 없지만 섭섭한 이는 조양호 회장”이라며 “조중훈 회장이라면 어땠을까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자신이 대표는 아니었지만 어찌됐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사업인데 왜 미리 위험 회피나 분산을 최 전 회장에 조언하지 않았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땅콩회항' 사건으로 기소돼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2015년 5월 22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뒤 석방되고 있다. / 사진=뉴스1
한진해운 사태로 조중훈 전 회장의 경영철학이 회자되면서 대한항공 문제도 도마에 올랐다. 조중훈 전 회장은 자서전을 통해 “낚싯대 10개를 걸쳐놓는다고 고기가 다 물리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즉, 최고경영자라면 무리한 사업확장을 경계하는 대신 시의적절한 판단력을 기르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한항공 상황은 이 같은 조 전 회장의 철학을 무색케 하고 있다. 지난 10일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에 따르면 7월 초 조원태·조현아 전·현직 대한항공 부사장에 대한 고발 건이 포함된 심사보고서를 한진그룹에 발송했다.

공정위 사무처는 이들 남매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자녀이자 대한항공 고위 임원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자회사인 IT서비스업체 ‘유니컨버스’와 기내 면세품 판매 업체 ‘싸이버스카이’에 일감을 몰아줬다고 의심하고 있다.

유니컨버스와 싸이버스카이는 조양호 회장 및 조원태·조현아·조현민 세자녀가 지난해까지 100% 지분을 소유하고 있던 자회사다. 이들 기업은 지난 5년간 총 1620억원 가량의 매출을 기록했다. 이 가운데 약 1200억원의 일감을 대한항공 등 한진그룹 계열사에서 받았다. 요행수와 일확천금을 가장 경계했다고 알려진 조중훈 전 회장 모습과는 다르다.

재계에서는 조양호 회장보다 경영 3세들의 행태가 더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조원태 대표이사는 과거 70대 할머니 폭언 및 폭행혐의로 입건됐던 전적이 있고 조현아 전 부사장과 조현민 부사장은 ‘땅콩 회항’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기업은 곧 사람’이라 믿었던 조중훈 전 회장의 모습을 찾기 어렵다. ‘제2 조중훈’이 한진에 등장하지 않는다면 ‘제2 한진해운’ 사태도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보원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는 “일본이나 미국의 경우 재벌 3세가 경영에 나설 경우 밑바닥부터 경험을 쌓는다. 우리나라 재벌 3세들은 낙하산으로 고위직에 오른다. 홀로 기업을 이룬 창업주와는 환경부터 다르다. 철학을 갖기도 어렵다”며 “재벌 3세들이 제대로 된 노사관계 노하우나 경영능력을 갖추기 어려운 이유다. 모범적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면 경영 일선에 물러나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하거나 겸손히 배울 수도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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