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웅의 콜라주 소사이어티

 

내가 공부하는 금융경제학은 경제학의 한 분과학문이다. 금융시장에서의 위험과 불확실성을 회피하는 것을 가장 우선적인 목적으로 한다. 여기에서 위험이란 어떤 사건이 발생할지는 예측이 되나 그 확률을 모르는 것. 예컨대 금융위기의 발생은 예측이 가능하지만 그 확률을 모르는 것이고, 불확실성이란 확률뿐만 아니라 어떤 사건이 발생할지도 예측이 되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경제적 인간이 경제 활동에 있어 효용 극대화를 추구하고, 그 효용을 추구하는데 있어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이 성립한다면, 이 맥락에서 경제적 인간은 위험 회피적 성향을 갖는다.

 

이 위험 회피적 성향의 가장 대표적 예가 통계학에서 언급되는, 수학자 니콜라이 베르누이가 최초로 언급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역설(St. Petersburg paradox)’이다. 이 역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도박을 하는데, 동전을 던져 뒷면이 나오면 다시 던지고, 앞면이 나오면 2의 n-1제곱 (n은 앞면이 나올 때까지 동전을 던진 횟수) 루블의 돈을 받는다. 이 도박의 참가비는 1만루블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 동전던지기 도박에 참여할 것인가? 이 도박의 기댓값은 간단한 무한급수 계산을 통해 무한대가 되지만, 사람들은 그 누구도 참여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역설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기대 효용이고, 그와 연결되는 것이 위험 회피 성향이다.

 

위험 회피 성향은 인간의 거의 모든 금융 활동에서 나타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포트폴리오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해리 마코위츠의 발언으로 유명한 이 포트폴리오 이론은 다양한 금융 자산으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하여 각 개별 자산의 위험인 가격 변동성을 헤지함으로서 개별 자사의 위험을 제거하고 안정적 수익을 추구하는 투자 방법이다. 포트폴리오 이론에서 시작된 현대 금융 이론은 모두 인간의 이러한 위험 회피 성향을 그 기저에 전제한다. 위험에 못지않게 경제적 인간이 회피하고자 하는 것은 불확실성이다. 위험과 달리 불확실성은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지만, 학자들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금융경제학은 위험과 불확실성을 통제하기 위한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금융경제학적 사고는 정치에도 적용될 수 있다. 금융경제학이 금융시장 참여자의 행동과 그에서 파생되는 문제들을 다룬다면, 정치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의 행동과 그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다룬다. 차이점이라면 금융시장 참여자는 실제 시장에 투자를 하는, 혹은 앞으로 투자를 계획하고 있는 사람으로 제한되는 반면, 현실 정치 활동의 참여자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거의 모든 시민이 된다. 그에 따라 이해관계가 훨씬 복잡해지기 때문에 해결이 더 어렵다. 금융경제학에서 기대 효용의 극대화를 다룬다면, 정치에서는 시민들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명제를 추구한다. 금융경제학과 정치는 모두 공리주의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금융시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책 시장에서도 회피해야 할 것은 위험과 불확실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경우 위험은 특정 정책 혹은 시민들의 정치적 활동과 그것들이 실제로 집행될 확률이 될 것이고, 불확실성은 정책이나 시민들의 정치적 활동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그 정책이 어떻게 펼쳐질지 확률을 계산할 수 없는 경우가 될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지속적으로 한 가지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심각한 형태로 나타나는 이 문제는 일종의 전쟁에 가깝다. 바로 페미니즘 이슈다. 여권 신장 혹은 양성평등 문제는 여성들의 교육 기회와 사회 참여가 증가하면서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어 왔으나, 최근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은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가부장적 문화와 여성에 대한 성적, 사회적 편견과 이에 대한 여성들의 반발 및 이러한 가부장적 문화와 편견을 미러링이라 불리는 다소 과격한 방법을 통해 표출하는 행위에서 비롯됐다. 이것이 파괴적이고 폭력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사실 이는 지극히 온건한 행위다. 영국의 경우, 애멀린 팽크허스트 부인은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받기 위해 방화와 유리창 깨기 같은 현실에서의 폭력까지 동원했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의 변화는 점진적으로, 항상 예측 가능한 변화를 통해 이뤄져 왔다. 아제몰루와 로빈슨이 연구한 서양에서의 투표권 확대가 그렇고, 미국에서의 흑인 시민에 대한 민권 확대가 그러하며, 유럽은 물론 미국과 아시아에서의 복지 확대 역시 그러하다. 충분한 사회적 논의를 거친 후 우리가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변화가 이뤄졌다. 인류는 이런 과정을 통해 발전을 이뤄왔다. 예측 가능한 범위를 초과하는 급진적인 변화, 예컨대 프랑스 대혁명이나 소비에트 혁명 같은 경우는, 일시적으로 시장의 변동성, 즉 위험과 불확실성을 키운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그 위험과 불확실성이 시장의 개선에 기여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에 못지않은 문제점도 야기했다. 이미 시장의 추세는 정해져 있는데, 급진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예측 불가능성을 야기했고, 그에 따른 문제들, 예컨대 나폴레옹 전쟁과 냉전 및 매카시즘을 초래한 것이다.

 

여성의 정치 참여부터 시작하는 여권 신장 역시 마찬가지다. 영국에서의 여성 참정권 운동이나 미국에서의 여성 참정권 운동은 그 자체에 더해 여성의 사회 참여가 증가하면서 다층적 층위에서 이루어진 경향이 크다. 그렇지만 이 운동이 당시 사람들의 예측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과격한 방화와 유리창 깨기 등 폭력적 수단을 동원한 영국에서의 여성 참정권 운동조차도 마찬가지다. 비록 방법은 과격했을지언정 노동 수요가 증가하고 남성 노동 증가율은 제한된 이상,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은 자명한 사실이고, 그렇다면 그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반대급부를 제공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여성들의 주장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보면 한국에서 여성들의 권리 신장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것이고 수용 가능한 것이다. 오히려 그것에 반대하면서 그것을 마녀사냥 식으로 억압하는 것이야말로 예측 가능한 운동을 예측 불가능하게 만드는 반동적이고 급진적인 행위다. 비록 과격한 표현은 있을지라도 그 표현의 이면에 숨겨진 여성들의 주장을 경청하여 반영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회피해야 할 것은 시장에서의 위험 및 불확실성이지 변화에 대한 요구가 아니다. 변화에 대한 요구를 억압하는 순간, 오히려 우리는 급증하는 위험과 불확실성에 직면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여성의 권리 신장은 보편적 인권 신장의 관점에서도 옳다. 일찍이 힐러리 로댐 클린턴은 199595일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된 UN 4차 세계여성회의 총회에서 여성의 권리는 인권이라는 연설을 한 바 있다. 그 연설에 따르면 여성을 존중과 존엄으로 대우하고,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평등하게 사랑하고 돌보며, 모든 가족이 안정되고 희망찬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는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 시작은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에서 부터다. 2016년 현재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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