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흔들기보다 취지 살릴 ‘구멍 메우기’에 지혜 모을때

얼마전 몇가지 현안에 대해 궁금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 IT 대기업 임원을 찾아갔다. 기업 회의실에서 면담을 마친후 “회사 기념품이라도 챙겨 온다는게 깜빡했다”고 인사치레 삼아 말을 던졌다. 그 임원은 손사래를 치며 “우리 회사는 이달부터 이미 '3·5·10제'를 시행하고 있으니 선물이라는 단어는 아예 입에 담지도 말라”고 했다. 

 

3·5·10제는 오는 9월 28일 시행을 앞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법) 시행령에서 예외적으로 인정하는 음식물(3만원), 선물(5만원), 경조사비(10만원)의 한도를 지칭한다. 시행을 거의 3개월이나 앞두고 정부나 공공기관도 아닌 민간기업이 자발적으로 새 제도를 운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김영란법은 이 법을 처음 제안한 김영란 전 대법관의 이름에서 따온 법의 별칭이다. 김 전 대법관은 지난 2010년 퇴임때 고액 수임이 보장되는 변호사 자리를 마다하고 로스쿨 강단에 서는 일을 선택함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줬던 인물이다. 전관예우가 판치는 법조계 세태에 경종을 울렸다. 

 

김영란법이 기존 부패방지법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직무 관련성이나 대가성을 따지지 않고 공직자의 금품 수수를 처벌할 수 있게 한 점이다. 공직자가 금품을 수수하더라도 직무 관련성이 부족하다며 처벌을 피해 빠져 나가는 일이 하루가 멀다하고 터진다. 넥슨 김정주 회장과 각별한 관계라는 진경준 검사장도 100억원대에 달하는 막대한 시세차익을 거둔 비상장 주식과 고급 승용차를 제공 받은 금품수수 행위를 놓고 대가성 여부가 수사의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된 바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투명성기구(TI)가 발표하는 국가별 부패인식지수(CPI) 순위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가중 매년 꼴찌 수준을 맴돌고 있다. 올해초 발표 자료에서도 34개 회원국중 27위에 그쳤다. 국격 훼손은 둘째치고 부패가 일상화됨으로써 평범한 국민들이 겪는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국민이 이 법에 대해 기대와 절대적으로 높은 지지를 보내는 것이 이상할게 없다. '김영란법' 시행령이 입법 예고된 지난 5월 실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는 66%가 '잘된 일'이라고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잘못된 일'이라는 응답은 12%에 불과했다. 

 

국민의 지지도가 높은 김영란법이지만 제정과정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다. 제안 초기부터 거센 반대에 막혀 3년가까이 표류한 끝에 지난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이후 부정부패 척결에 대한 여론이 반짝 높아진 2015년 3월에야 간신히 국회를 통과했다. 그러고도 국민권익위원회에서 시행령이 제정되기까지 갑론을박으로 시간을 보내며 또 1년 2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시행을 코앞에 두고도 법을 흔들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가뜩이나 부진한 경제를 더 위축시키고, 특히 명절 때 특수를 누리는 농수축산 농가나 어민, 음식점, 꽃가게 등 자영업자들이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공직자가 아닌 민간인 신분의 언론인과 사립학교 교원을 적용대상에 포함시킨 것을 두고 위헌 소송도 제기돼 있다. 새누리당 의원 22명은 적용 대상에서 언론인과 사립학교 교사를 빼고, 국회의원을 포함하는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해 놓았다.

 

김영란법에 이런 저런 헛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제 정신이라면 김영란법의 근본 취지에 반대할 국민은 없으리라고 본다. 김영란법에 대한 비판이 이런 취지를 더 잘 살릴 수 있는 꼼꼼하고 강력한 ‘법다운 법’을 만들기 위한 충정에서 비롯된 ‘사랑의 매’라면 국민의 박수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 어떤 명분을 내세우든 법 자체를 무력화해 구태를 지속시킴으로써 부정한 방법으로라도 자신의 알량한 이익을 지켜내겠다는 얄팍한 꼼수라면 국민적 지탄을 면하기 어렵다.

 

경제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걱정하지만 우리나라의 부패 정도가 OECD 평균 수준으로만 개선돼도 경제성장률을 매년 0.65%포인트 높일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부패로 인해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는 귀중한 경제 자원을 공정하고 효율성 있게 활용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김영란법 시행은 겉모양만 선진국을 흉내내고 있을뿐 소프트웨어는 형편없이 뒤져 있는 한국 사회와 경제를 업그레이드시킬 소중한 기회다. 민간기업도 자발적으로 3·5·10제 시행에 들어가는 판이다. 법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대착오적인 시도보다 법의 구멍을 촘촘히 메워 부패한 사회상을 청산할 수 있도록 보완하는 일에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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