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임원 앞세워 합의 시도...대책위 소송 취하 후 태도 돌변

 

 

현대중공업과 사내협력사대표 대책위원회(대책위) 간 막후거래 정황이 포착돼 논란이 예상된다. 사진은 울산 동구 현대중공업. / 사진=박성의 기자

 

현대중공업이 전직 임원을 앞세워 사내협력사대표 대책위원회(대책위)를 돈으로 매수하려 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현대중공업은 협력사 대표 수명에게 수십억원을 지급하는 대가로 대책위를 해체하고 그 동안 활동을 사과하는 전단문을 배포하라고 요구했다. 

 

특히 대책위가 청구한 공사대금 미지급 소송을 취소하게 하고 이미 진행 중인 재판에 증인과 자료를 일체 제공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종용했다.

대책위가 이 같은 요구를 수용하고 이행했지만 현대중공업은 약속한 돈을 지불하지도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수주 가뭄 탓에 감원까지 시도하고 있는 현대중공업이 돈을 앞세워 막후 교섭을 시도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 “돈 줄테니 재판에 증인·자료 일체 지원 마라

 

합의서에는 현대중공업이 협력사에게 지급하는 현금 액수와 요구 조건이 명시돼 있다. 현대중공업 전직 간부 K씨는 현대중공업주식회사 대리인으로 기재됐다. / 사진=박성의 기자

 

현대중 사내협력사대표 대책위는 지난해 11월 28일 구성됐다. 현대중 기성 삭감 여파에 폐업한 대표들 모임이다. 소속 대표들은 현대중 상납비리를 폭로하는 과정에서 사측과 민·형사 소송을 벌였다. 


대책위 폭로가 이어지던 지난 3월 24일 과거 현대중 협력사지원부 상무로 재직했던 K모씨가 대책위 사무실을 찾았다. K씨는 대책위 위원장에게 “현대중이 협상 테이블을 깔아보라며 나를 부르더라. 적장한 선에서 타협하자”며 합의를 종용했다.

K씨가 전달한 중재안은 파격적이었다. 현금 45억원을 대책위에 제공하고 사측이 대책위를 상대로 제기한 명예훼손 및 업무방해 금지 등 가처분 소송을 취소한다는 조건이었다.

본지가 입수한 ‘위로금 지급 합의서’ 및 ‘합의금 지급 보증 각서’에 따르면 현대중공업이 위 조건을 이행하는 대신 대책위는 3일 안에 해체하도록 돼있다. 또 합의 나흘 안에 대책위가 그 동안 현대중공업에 해를 끼쳤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울산 동구지역에 배포하도록 했다.

아울러 대책위 소속 대표들이 제기한 공사대금 미지금 청구소송을 취하하고, 이미 진행 중인 재판에 증인 및 자료를 일체 제공하지 않겠다는 것을 서명하게 했다.

국내 대형로펌 변호사는 “미국은 돈을 주고 소를 취하하게 하거나 증인 출석을 방해할 경우 사법방해죄로 처벌 받을 수 있지만 국내법으로는 형사처벌 할 수 없다”며 “다만 윤리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있다. 이 같은 합의로 원고가 부당한 판결을 받는다면 민사적 책임을 피고가 지게 될 수 있다”고 밝혔다.

◇ 현대중공업 고위간부 합의내용 몰랐나

협력사대책위는 이 같은 합의 수용이 불가피했다고 토로한다. 대책위 관계자는 “로펌을 앞세운 대기업과 소송전을 벌이기가 쉽지 않다. 현대중으로부터 입은 피해액에 못 미치지만 가정을 돌보기 위해서는 (대책위를 해체하더라도) 합의금을 받는 게 낫다고 봤다”고 말했다.

대책위는 3월 31일 약속대로 소송을 취하하고 울산 동구 일대에 “협력사대책위가 이유없이 사측 명예를 훼손해 죄송하다”는 사과문 1500장을 배포했다. 그러자 현대중 태도가 돌변했다. 제시한 금액 중 일부를 사용해 합의서에 기재되지 않은 대표들까지 회유하라고 했다. 추가적인 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현금 지급과 소송 취하를 해줄 수 없다고 압박했다.

대책위 관계자는 “협력사 대표들은 기성 삭감 탓에 모두 수억원에서 수십억원씩 피해를 입었다. 사측도 이를 알고 있는 상황”이라며 “경제난에 빠진 대표들에게 돈을 미끼로 던진 것이다. 그 후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자 말을 바꾼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대중공업은 대책위 주장을 허위라고 말한다. K씨가 어떤 목적으로 이런 중재를 진행했는지 알 수 없으며 사측 차원에서 공식적인 합의금을 마련한 적도 없다는 주장이다.

다만 본지가 입수한 K씨와 대책위 간 통화내용에는 현대중공업 간부 수 명의 이름이 나오며, 이들이 위로금 지급건을 알고 있다고 했다. 또 현대중공업 협력사지원부 간부 역시 합의를 위해 대책위와 통화했던 사실이 확인됐다.

대책위와 대화한 당사자로 지목된 현대중공업 협력사지원부 간부는 “K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지만 공식적으로 이런 일을 의논한 적이 없다”며 “대책위에서 왜 사측을 거론하는 지 알 수 없다. 돈 얘기는 꺼낸 적도 없으며 이런 합의내용 자체가 금시초문”이라고 밝혔다.

한편 전직간부 K씨는 이번에 공개된 합의내용이 사측과 관계됐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하지 않았다. 다만 K씨는 “중재안 마련 전후로 여러 사정이 있다. 나중에 해명하겠다”며 전화를 끊은 뒤 더 이상 연락을 받지 않았다. 대책위는 현대중공업과 K씨를 사기혐의 등으로 고소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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