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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12일 [W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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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폐녀는 가라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당연히 남자가 주인공인 줄알았는데 허를 찌르는 영화들이 있다.

사진=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 스틸 컷

요즘 공연계에서는 ‘성 중립 캐스팅’이 화제다.​ 영국에서는 문화·예술이 각종 차별을 재생산하는 것에 반대해 성별, 인종, 나이, 장애 등을 떠나 캐스팅하는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다. ‘햄릿’을 여배우가, ‘오필리아’를 남배우가 연기하는 식이다. 한국에서도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록키호러쇼> <더데빌> 등이 남녀 배우 더블 캐스팅을 시도했다. 영화 쪽은 상황이 다르다. 공연의 주 소비층은 문화생활에 적극적으로 시간과 돈을 쓰고 전위적인 시도에 관대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영화 관객은 훨씬 다양하다. 변화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고스트버스터즈>(2016), <오션스8>(2018) 등성별을 바꾼 리메이크작들이 성공한 건 고무적이다. 하지만 일부 <스타워즈> 시리즈의 팬보이들이 <로그 원:스타워즈 스토리>(2016)의 높은 흥행 수익에도 불구하고 “망한 영화”라고 현실을 부정하고 “이건 <스타워즈>가 아니다”라고 분노한 걸 생각하면 갈 길이 멀다. 

 

한국 영화 <비밀은 없다>(2015)가 개봉했을 때도 비슷한 좌절을 느꼈다. 이 재밌는 영화가 왜 흥행에 죽을 쑤나 싶어 관객 반응을 살피다 충격을 받았다. 김주혁이 사건을 해결하는 역할일 거라 기대하고 그의 서사를 따라가다가 맥락을 놓쳤다는 후기들 때문이었다. 설마 그 정도라고? 이영화는 시작부터 대놓고 여성 서사인데 당연히 남자가 해결사일 거라는 확신이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그들은왜 여성을 주목하거나 여성에게 감정을 이입하거나 자아를 투사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걸까? 이 고민들은 내게 뜻밖의 발견을 안겨주었다. 남성 서사가 압도적으로 많아 익숙해졌을 뿐, 나 자신도 엇비슷한 완성도라면 같은 성별인 여자가 주인공일 때 더 잘 몰입한다는 사실이다. 페미니즘이 시대정신으로 부상한 최근 몇 년 사이, 나 같은 발견을 한 사람들이 더 있을 것이다.

 

아직 잘 모르겠다면 다음 두 편의 영화를 보자. 멸망후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가족을 그린 <콰이어트 플레이스>(2018)와 <더 도메스틱>(2018)이다. 먼저 <콰이어트 플레이스>에는 소리로 타깃을 찾아 죽이는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등장한다. 주인공 가족은 외딴집에 고립된다. 아버지 ‘리(존 크래신스키 분)’는 무선통신으로 외부와 접촉을 시도하지만 몇 년 동안 응답이 없다. 그의 아내 ‘에블린(에밀리 블런트 분)’이 무슨 노력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도대체 <엣지 오브 투모로우>(2014)와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5)의 주인공이 왜 저런 역을 맡았나 싶게 존재감이 없다.

부부 금슬은 좋다. 사춘기 딸과 유소년 아들이 있는데그 와중에 또 임신을 한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잎새에 이는 바람소리’에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애는 어떻게 낳고 갓난애 울음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임신을 하나?

그 밖에도 말 안 되는 내용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실소가 나올라치면 볼 만한 공포나 추격신이 펼쳐지고, B급 영화들과는 비교할 수 없게 연기가 진지해서 킬링 타임용으로는 괜찮다. 무엇보다 결말이 통쾌하다. 에블린 혼자 출산을 하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쫓기는 난장판 끝에 집안 여자들이 뭔가를 해낸다. 마지막 에밀리 블런트의 표정이 압권이라 저도 몰래 따라 하고 있는 당신을 발견할 거다.

 

<더 도메스틱>에서는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부터 생존한 인간들이 서로를 사냥한다. 주인공(인 줄알았던) 남자 ‘마크(테일러 호츨린 분)’는 목숨 걸고 아내 ‘니나(케이트 보스워스 분)’를 구하러 가지만 니나는 반가운 눈치가 아니다. 사실 바이러스가 퍼지기전 마크를 먹여 살리다 지친 니나가 이혼을 결심한 상태였다. 남편이 총싸움, 몸싸움 해가며 지켜줘도 니나는 “영웅 행세 하지 말라”며 차갑게 군다. 전형적인 ‘민폐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관계가 역전된다. 빈집에 들어가서 왜인지는 모르지만 등판에 ‘KOREA’가 새겨진 용무늬 점퍼를 찾아 입은 니나는 심경 변화를 일으켜 사격을 가르쳐달라고 한다. 화려한 점퍼를 입은 케이트 보스워스의 모습은 <드라이브>(2011)의 반항아 라이언 고슬링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웬걸, 니나가 사격에 천부적인 재질이 있는 걸로 드러난다. 그 후 니나의 광기가 폭발하면서 영화는 엉뚱한 방향으로 질주한다.

 

<콰이어트 플레이스>나 <더 도메스틱>이나, 세상을 구하는 게 꼭 여자여야 할 필요도, 남자여야 할 필요도 없다. 이런 경우 흔한 선택은 ‘가족을 위해 몸 바치는 남성 액션 영웅’을 그리는 거다. 그런 역할을 여자가 했기 때문에, 장단점이 뚜렷한 상업 영화기 때문에, 캐스트와 관람자의 성별에 따른 몰입도 차이를 확인하기에 좋다. <오션스8>에서 범죄단을 조직하던 ‘오션(산드라 블록 분)’이 이런 말을 했다. “남자는 주목받지만 여자는 무시당하지. 이번만은 우리가 무시되면 좋겠어.”

<콰이어트 플레이스>와 <더 도메스틱>은 이 법칙을 영리하게 이용한다. 피보호자, 혹은 ‘민폐녀’였던 여자들이 변신하는 모습을 통해 뻔한 스토리에 반전을 부여한다. 남자들도 그 반전에 갑자기 집중력이 급상승하는 효과를 느꼈는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당신도 그럴지 모른다.​ 

 

글쓴이 이숙명

칼럼니스트. 영화 잡지 <프리미어>, 여성지 <엘르> <싱글즈>에서 기자로 일했다. 펴낸 책으로 <패션으로 영화읽기> <혼자서 완전하게> <어쨌거나 뉴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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