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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25일 [S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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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바보야, 문제는 이사회야!”

아시아에서도 최하위권인 이사회 독립성…해외투기자본 핑계로 상법개정 막는 행태 한심

필자는 오래전 한 재벌계열사 기획실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 당시 담당 업무 중 하나는 이사회 의사록 작성이었다. 오너 지시사항을 먼저 실행하곤 사후적으로 이사회 결의에 의한 것처럼 꾸며 놓는 일이다. 열리지도 않은 이사회가 열린 것처럼 ‘허위 의사록’을 작성하는 일은 고역이었지만, 그 당시의 관행이라 하급자인 필자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무튼 당시 이사회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이른바 ‘페이퍼 이사회’였고, 모든 의사결정은 오너로부터 나왔으며 이사회는 그것을 무조건 정당화 시켜주는 들러리에 불과했다.

이후 IMF(국제통화기금)사태가 터졌다. ‘주식회사 한국’은 맹공을 당했다. 그 중 한국의 유명무실한 들러리 이사회는 가장 큰 질타를 받았다. 모든 주주들의 이익 대변자가 아닌, 오로지 지배주주에게만 충성하는 이사회가 ‘주식회사 한국호’ 침몰의 공범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 보완책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사외이사제도’였다. 즉 태생적으로 오너에게 종속된 사내이사에게 오너에 대한 견제와 균형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일정비율 외부인사들을 사외이사로 앉혀 지배주주를 견제토록 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외이사 제도 도입 후 ‘주식회사 한국’의 이사회들은 주주들의 대변자로서 오너에게 제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그 답은 매우 부정적이다. 해외 조사결과와 투자자들에 따르면, 이사회 독립성 측면에서 한국은 아시아권에서조차도 최하위권이다. CLSA의 'CG Watch 2016'을 보면, 아시아 12개국 중에서 한국 이사회 독립성은 꼴찌에서 두 번째를 기록했다. 우리의 독립성 점수는 19.4점으로 필리핀, 말레이시아, 중국보다도 뒤처져 있다.

또한 작년에 필자가 경험한, 한 사건은 위 평가결과를 뒷받침한다. 필자는 해외 투자자들을 대리해서 국내의 대표적인 블루칩 기업 사외이사와 면담을 진행했고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약속을 불과 며칠 앞두고, 돌연 현직 대학교수인 그 사외이사는 면담 취소를 알려왔다. 취소야 할 수 있다지만 그 사유가 필자를 아연실색케 했다. 즉 자신은 “사외이사를 맡고 있는 그 기업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므로 굳이 만나 할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란다. “아는 바 없음”은 표면적인 이유일 것이고, 진짜 이유는 해당 기업 측의 압력이 작용한 때문일 것이다.

요즘 상법 개정안을 놓고 여야 간, 재계와 진보 진영 간 논쟁이 뜨겁다. 주로 야당의원들이 발의한 집중투표제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선임,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등에 대해 재계는 다음의 논거를 들어 반대한다. 즉 위 개정안이 통과되면 국내 상장기업들이 해외 헤지 펀드들의 먹잇감이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해외 헤지펀드 먹잇감’이란 단골 프레임은 이제 식상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침소봉대이고 과장된 기우에 불과하다.

집중투표제를 예로 들어 생각해 보자. 서스틴베스트의 조사에 따르면 포스코, 강원랜드, 우리은행, KB금융, 신한지주, SKT, KT, 한국전력, 가스공사 등과 같은 국내 굴지의 기업들이 이미 집중투표제를 도입한 상태다. 특히 외국인 지분율이 매우 높은 국내의 대표적 금융그룹들과 통신서비스, 전기, 에너지 등의 기간산업 중추기업들이 이미 집중투표제를 도입해 놓은 것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그들은 무슨 용기와 배짱으로 집중투표제를 도입한 것일까. 그럼에도 해외 헤지 투기펀드들은 왜 그들 기업에게 집중투표제를 사용치 않을 것일까. 간단히 답하자면, 해외펀드들 역시 무분별하게 집중투표제를 행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제 ‘해외 투기 헤지펀드 프레임’은 그만 사용하자. 글로벌 시대에서 낙오된 시대착오적 프레임이니 말이다. 그 대신, 보수 측과 재계는 상법 개정안에 대한 반대의견만을 제시하기 이전에 우선 자기성찰을 해야 한다. 해외의 권위 있는 지배구조 평가기관들의 우리 이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도 경청해야 한다. IMF의 공범이었으나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거수기에 머물러 있는 우리 이사회의 근본 문제들을 직시해야 한다. 동시에 상장기업으로서 권리와 혜택을 주장하기 이전에, 그에 상응하는 책임과 의무를 균형 있게 수행했는지도 반성해야 한다. 만일 거수기 이사회의 흑역사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한국 자본주의는 “오너의, 오너에 의한, 오너를 위한” 들러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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